영화(映畵)는 순간을 기록한 장면을 연속적으로 촬영하여 기록한 동영상을, 같이 기록한 음성과 함께 편집하여 어떤 내용을 전달하게끔 꾸며서 만든 영상물이다. 활동사진(活動寫眞, motion picture)이라고도 한다. 종래에는 광학적인 방법의 필름으로 촬영한 다음 편집 제작 과정을 거쳐 영사기를 통해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영화관에서 상영하였다. 최근에는 텔레비전과 멀티미디어 컴퓨터의 발달로 많은 영화가 제작부터 감상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방식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인디 영화라 불리는 독립 영화 역시 발전하고 있다. 더욱이, '독립 영화'란 이윤을 목적으로 삼는 상업 영화와 달리 창작자의 의도가 우선시되며 자본과 배급망에서 '독립'되어 있어 그렇게 불린다.
최초의 영화는 흔히 《중국인 세탁소에서 생긴 일》 또는 《열차의 도착》을 꼽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 노동자들의 퇴근>을 포함한 10편이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최초로 상영된 영화다. 대한민국의 최초의 영화는 김도산 감독의《의리적 구투》(1919)이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를 공개하였다. 이듬해 3월 22일 렌가(街)에 있는 국민공업장려회에서 《뤼미에르 공장의 점심시간》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시사(試寫)했고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었다. 이것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영화는 단지 신기한 볼거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르주 멜리에스는 영화를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로 이용하는데 큰 공헌을 했고, 다양한 장르와 연출기법을 만들어 나갔으며,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가 예술의 한 장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후 데이비드 그리피스와 찰리 채플린으로 대변되는 무성 영화의 전성기가 도래하였고, 1927년에는 최초의 유성 영화(토키:talkie) 《재즈 싱어》가 워너 브라더스에 의해 뉴욕에서 공개되었다. 이후 미국에서는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영화가 제작, 상영되었고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유럽에서는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탐구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이는 네오 리얼리즘, 누벨 바그, 뉴저먼 시네마 등으로 불리는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감독들의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1950년대 TV가 상용화되면서 영화의 영향력은 한번 주춤하게 된다.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헐리우드는 여러 가지 기술들을 적용하기 시작하는데, 차별화를 위해 3D와 스케일을 강조한 스크린 사이즈의 확대(시네마스코프, 비스타비젼 등)였다. 아직 적청 방식의 3D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편할만큼 발전되지는 않은 상태였고 폭스의 시네마스코프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다양한 와이드스크린 포맷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영화시장은 다시 호황기를 시작하고, 20세기말에 이르러 기존의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거대 미디어그룹으로 성장한다. 70년대에는 이러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하는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도래하였다.